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재갑자 천하대길
(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마땅히 누른 하늘이 서리라
때는 바로 갑자년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황건적의 시작, 요술 시작
삼국지를 한번이라도 읽어봣으면 처음에 나오는 삼국지의 시작인 황건적의 난
황건적이라고 부르는 놈들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황건의 난 이라고 한다.
황건적의 수령인 장각은 거록사람으로 헌원씨 (삼황오제 중 황제)
노자 를 섬기며 술법을 행했는데 그것을 본 백성들이 장각을 따르며
신격화 시켯는데 장각을 신으로 모신 종교가 바로 '태평도' 이다
백성들을 따르게 한 술법 있는데 부적을 태워 물에 탄 다음에 마시게 하고
잘못을 뉘우치며 절하게 했는데, 그것은 인간의 심리를 노린 것으로 인간이 신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을 경우 몸이 낳아진다고 느끼는 것을 노린 것이다.
물론 부수의 효과는 없었지만 심리적으로 몸이 낳아진다고 생각한 사람은
부수 때문에 낳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태평도를 섬기는 것이다.
장각, (張角, ? ~ 184년)
태평도를 이끈 장각이란 인물은 누구인가
그는 거록사람으로 도교를 믿었는데 태평도가 성립된 다음에는 여덟명의 제자를
전국으로 보내어 태평도를 퍼트린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를 대현량사, 황천태평, 천공장군 이라고 칭하였다.
동생 장보, 장양 에게는 지공장군,인공장군이라는 칭호를 내려서 사용하게 했다
대장군,황제 등등 어려운 단어를 쓰는것 보다는 천지인 이라는
쉬운 한자를 사용하여 백성들의 호응을 끌어내려고 한것 이다.
봉기의 시작
184년 3월 5일, 장각이 거사하기로 한 날이다.
그는 낙양에서 봉기하기 위하여 중상시 봉서, 서봉 을 마원의에게 구슬리게 하고
전국을 36방으로 나눈다. 낙양에서 봉기할때는 마원의가 형주,양주 의 수만명을
이끌고 봉기하고 장각은 기주 업성쪽에서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마원의가 낙양에서 거병 → 봉서 서봉 은 내부에서 호응
→ 장각은 업성에서 외부적 압박 → 천하통일
하지만 이런 장각의 계획은 당주의 고발로 완전히 다른 길로 흐르게 된다.
당주의 고발로 인해 낙양의 마원의는 하진의 군사들에게 잡혀 거열형을 당하고
위사(황실 호위병)와 백성들을 조사하여 수천 명을 죽이고 장각을 잡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 거사를 앞당기게 된 계기
장각 등은 고발된것을 알고 당장 기주로 가서 거병하라는 명을 내린다.
황건을 표시로 하여 봉기하였기에 그들을 황건적이라고 불렀다.
황건적의 군사 제도
황건의 군사제도는 제법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 이라고 하는 대를 나누어서 운영했는데 그 수는 36개 였다.
36개 방의 구별 방법은 방의 인원수에 따라 다른데 대방은 1만 여명,소방은 6~7천 여명 이었다.
방들은 '거수' 라고 하는 장군을 세워 운영하게 하였다.
군사들을 나누어서 운영하는 것은 전투에서도 상당한 효과를 내었는데,
주준과 황보숭의 군대를 막아낸 것을 보면 알수가 있다.
토벌군
황건적의 집결지는 크게 세 지역이다 기주, 영천,위군 으로 기주와 위군은
장각의 영향이 크게 미치는 곳이었고 영천은 파재와 같은 거수 들의 역활이 중요한 곳이었다
그와 더불어 후한의 봉국 이었던 안평, 감릉의 백성들은 반열을 일으켜 안평왕 유속
감릉왕 유충 을 사로잡아 바치는 정도에 이르렀다
천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북지태수 황보숭이 중장전(황제의 자금)의 자금을 풀어 무기를 사게 하고
서원의 마구간의 말을 내어 군사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와 더불어 중상시 여강은 황보숭과 함께 당고를 풀라는 주장을 하였다.
조정에서는 하남윤 하진을 대장군, 신후 로 승진시키고 좌우림, 우우림의 병력을 주어
경사를 지키게 하였다. 그와 더불어 함곡, 태곡, 광성, 이궐, 환원, 선문, 맹진, 소평진 의
여덟개의 관문에 도위를 두어 관문을 지키게 하였다.
토벌군으로는 북중랑장 노식, 좌중랑장 겸 거기장군 황보숭,우중랑장 주준 을 파견하였는데
노식은 장각이 있는 기주를 토벌하였고 황보숭, 주준 은 함께 영천으로 향하였다.
영천 토벌군
영천 토벌군을 이끈 사람은 황보숭과 주준 이었다. 그 군사는 4만여 명 으로 각자
1군씩을 이끌었다. 4만명 이라서 병력면에서 비슷하지 않나 싶었지만 황실의 군사는
잘 훈련된 군사로 소수정예 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그런 토벌군에 비해 황건군은
성인 남성이면 모두 병력으로 썻는데 그 병력은 물량에서 토벌군 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주준의 군사들이 모자랏던 탓인지
주준은 첫 전투에서 황건의 거수 파재에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주준의 모습을 본 황보숭은 장사를 지키기 위해 퇴각하였다.
퇴각한 이후 파재의 군사가 황보숭의 장사를 포위하였다.
군부대 안에서는 모두 두려워 하였는데, 황보숭은 황건군이 풀숲을 엮어
영체를 세운점을 이용하여 날쌘 군사들을 포위망 밖으로 보내 횃불을 던져
불을 태웠으며 성 위에서도 횃불을 들어 호응하게 하는 등 황건에게 혼란을
주었고 그 틈을 타 황보숭은 주준과 함께 파재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황보숭은 도향후로 승진하게 된다.
당시의 전투에서는 기도위인 조조도 참전하여 수만 급을 배었다고 한다.
기주 토벌군
영천이 함락되고 기주에서는 아직 노식이 장각과 전투 중일때
영천토벌군을 이끌던 황보숭,주준 은 다시 전투를 재개하였다.
여남, 진국의 황건을 토벌하고, 양적에 있는 파재를 추격하고
서화에서 황건의 거수 팽탈 을 공격하여 이들을 쳐부수는 등 활약을 하였다
남은 황건적들은 항복하여 영천, 진국, 여남 3군은 모두 평정되었다
3군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황보숭,주준 에게 관직을 주려 하였으나
황보숭은 공을 주준에게 돌리며 관직을 받지 않았고, 주준은 서향후 겸 진적중랑장 으로 승진 시켰다. 그 후 황보숭에게는 동군을 토벌하게 하고 주준은 남양을 토벌하게 하였다.
황보숭은 창정에서 복사를 사로잡고, 하북 위현 에서 장량과 맞서 싸웠는데
장량의 군대는 황건군 정예부대라 첫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그러자 황보숭은 적을 관찰하다가 적을 기습하여 대파하였다
그 전투에서 황보숭은 장량의 목을 베고, 이미 죽었던 장각을 부관륙시 하였다.
그 직후에도 하곡양을 공격하여 장보를 베고 10만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좌거기장군 겸 기주 주목,괴리후 로 책봉하였다.
기주를 토벌하던 노식은 소황문 좌풍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서 쫓겨나고,
동중랑장 동탁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왔지만 계속 밀리던 상황이었다.
주준 (朱儁, ?~195년)
남양으로 갔던 주준은 좌군사마 였던 손견, 형주 자사 서구 와 완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완성에 있던 장만성은 죽었지만 그 잔당인 10만 여명이 조홍을 우두머리로 세우고 농성 중 이던 것이다
계속된 전쟁 후 조홍을 제압했지만 황건적들은 다시 한충을 대장으로 하여
완성을 점거하고 다시 항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성에서 완강히 버티자 주준은 서남쪽을 치다가 동북쪽을 공략하여
완성을 점거하고 작은 성으로 후퇴하였다.
황건적은 항복하기를 바랫지만 주준은 받아들이지 않고 전투를 이었으나
주준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주준이 책략을 내어 포위를 풀자 한충은 나와서 싸웟으나
주준의 군대에게 대패하고 1만여 명이 죽었으며, 남양태수 진힐에게 죽었다
황건적은 손하를 우두머리로 삼고 완성에서 농성하였으나 손견에 의해 완성이 함락당한다.
손하가 도망가자 주준은 서악의 정산까지 쫓아가서 그들을 격파하고 1만여 명을 참수하였다.
이렇게 강성하던 황건적은 모두 격파당하고 작게 주, 군 에서 몇개의 반란을 제외하고는
황건의 난이 진압되었다
마지막으로 청주에서 30만이라는 대군을 황건적이 모으기는 하였으나
공손찬에게 약 10만여 명이 상하고 결국 조조에게 귀속되었다